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베르톨트 브레히트
“다른 건 없습니까?”
온갖 까탈스러운 손님들로 잔뼈가 굵은 모 주얼리 브랜드 강남점 매장의 권혜인 매니저는 늦은 오후 들이닥친 한 고객을 나긋한 미소를 띤 채 상대 중이었다.
정성껏 우려 서비스로 낸 홍차엔 손도 대지 않고 다리를 꼬고 턱을 괸 자세로 매장에 구비된 모든 반지들을 꺼내오라 하고선 정작 이래도 흥 저래도 흥 시큰둥한 눈길로 응시하는, 잘생겼지만 어딘가 재수없는 남자를.
“이건 어때요.”
남자가 가리킨 반지는 1캐럿 다이아가 촘촘히 둘러진, 이 중에서도 고가에 속하는 라인이었다.
가격을 묻는 건가. 권 매니저는 친절히 응대했다.
“이 제품은 561만원입니다, 고객님.”
“아니. 가격 말고 설거지할 때 안 불편하냐고요.”
“…….”
흔히들 구혼 멘트로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겠다’ 라며 입 발린 소리일지언정 호언장담을 하는데 이 손놈…아니 고객님은 이런 비싼 반지를 끼워주고 설거지를 시킬 생각인가. 여하튼 돌아온 질문에 대답은 해야 했기에 경련이 이는 입가를 끌어올리며 그녀는 다시 방긋 웃었다.
“호호, 고객님도 참. 식기세척기를 쓰시면 되는데. 신부님 손은 소중하니까요.”
“내 말이 그 말입니다.”
“예?”
“식기세척기뿐인가. 직원을 다섯이나 뒀는데 굳이 손으로 닦아야 안 깨진다고 지가 나서서 뽀득뽀득 닦아대니 손이 안 트고 배기겠어요? 반지를 사면 뭐해. 일할 때 방해된다고 서랍 안에 처박아두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갑자기 묻지도 않은 한탄을 늘어놓으며 남자는 투덜거렸다. 애인이 설거지를 본인이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가. 매니저는 지레짐작으로 결론짓고 현타를 맞아 그대로 자리를 뜰 기세인 남자에게 권했다.
“신부님도 같이 오셔서 고르시면 어떠세요? 함께 보면 정하기도 더 쉬우실 텐데.”
“—같이?”
남자의 분위기가 대번에 험악해졌다. 흡사 너 잘 걸렸다는 듯 뾰족해진 눈빛에 실언이라도 했나 싶어 매니저는 얼른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내가 몇 번을 같이 오자고 했을 것 같아요? 이게 무슨 집 앞 구멍가게에서 과자 한 봉지 사는 것도 아니고 반지를 나 혼자 보러 가냐니깐 그 녀석이 뭐라는 줄 압니까? 자긴 아무거나 괜찮으니 알아서 사랍디다. 하!”
와다다 쏘아붙인 뒤 남자는 천장을 노려보며 후우,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윽고 치밀어오른 분노를 가라앉혔는지 그는 평정을 되찾았지만, 이제는 반대로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애인이 바쁜가 보네. 남자가 조금 안쓰러워진 매니저는 달래듯 말을 건넸다.
“바쁘면 못 오시는 경우도 많아요. 신부님 손이 어떤 스타일이신가요? 사진이 있으면 보여주셔도…….”
“그 녀석 손이요?”
화제 전환에 남자는 본인의 기억을 더듬는지 눈빛이 멀어졌다.
“제 손보다 크고 두텁습니다. 반지를 낄 약지 마디가 굵어요. 피부색은 까무잡잡하진 않은데 햇빛에 좀 탔고. 주먹이라도 쥐면 어찌나 험상궂은지, 원. 이런 손으로 꽃다발 리본 꼬물꼬물 접는 게 용하지 않습니까? 귀엽다니깐. 하하.”
…음?
들어오는 정보값에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혼자 신나게 떠들던 남자가 핸드폰 사진첩을 뒤져 멀리서 잡힌 손 모양을 클로즈업해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사진을 빤히 보던 매니저는 이제까지 보여준 반지들을 모조리 집어넣고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남성용 웨딩밴드로 다시 보여드릴게요.”
우여곡절 끝에 고른 반지가 얌전히 담긴 쇼핑백을 흔들며 김낙원은 귀갓길에 올랐다.
결혼반지라. 놈에게 코가 꿰인 때만 해도 언감생심 꿈꾸지도 못한 이 일생일대의 이벤트가 현실로 이뤄진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라는 생각과 함께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직원이 곱게 묶어준 크림색 새틴 리본을 풀고 케이스에서 반지를 꺼냈다.
영롱한 빛을 뿜는 플래티늄 웨딩밴드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노을빛을 받아 난반사했다.
놈의 취향을 생각해 고른 심플한 디자인의 반지.
……마음에 들어 할까.
박목화와 결혼을 한다.
기쁘냐고? 그야 당연하다.
기쁜 나머지 여전히 얼떨떨해서 현실감이 없을 지경이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전혀 예상치 못한 수순을 밟은 탓도 있지만.
발단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늦봄의 어느 날이었다.
드물게 김낙원이 이른 출근을 한 날. 카페에 나가기 전 밀린 집 청소를 하던 박목화는 둥그런 원통형 물체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들고 있던 쓰레기봉투를 바닥에 두고 자유로워진 손을 서슴없이 휴지통 안에 넣은 그는 목표한 물건을 꺼내 들었다. 물건의 정체는 겉봉투에 「XX병원」이라고 쓰여 있는 얄팍하게 접힌 종이 한 장이었다.
무슨 서류 같은데, 실수로 버렸나. 동거인의 것임이 분명한 종이를 한 손에 들고 박목화는 잠깐 고민했으나 일단 확인을 하고 버릴까 싶어 열어보았다. 직사각형으로 두 번 접힌 종이를 펼치자 크게 적힌 ‘소견서’라는 글자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내용을 차근히 눈으로 훑던 그의 손은 어느샌가 종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나 왔다, 박목화.”
언제나와 같이 퇴근 후 카페로 직행한 낙원은 항상 보이던 듬직한 등이 보이지 않아 어라? 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녀석 어디 갔어.”
“형, 집에 가셨는데요.”
직원 애들의 대답에 낙원은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나 싶어 휘파람을 불었다. 천하의 박목화가 이 시간에 벌써 집에 갔다고?
“아. 사장님 오시면 집으로 바로 오라고 하셨어요.”
놈이 남긴 전언에 알았다고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잠깐 이상하단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뭐야, 그럴 거면 나랑 만나서 같이 들어가지.
여하튼 놈이 웬일로 이른 퇴근을 했다는 것에 신나서 김낙원은 발걸음도 가볍게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제때 저녁을 먹겠군.
“왔냐.”
현관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낮게 깔린 목소리가 김낙원을 맞았다.
구두를 벗다 말고 일순 안으로 들어가는 걸 망설였다. 거실 소파에 앉은 박목화는 직각으로 세운 무릎 위에 양팔을 얹어 깍지를 낀 채, 상반신을 비스듬히 앞으로 기울인 자세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라?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낙원이 눈을 도르륵 굴렸다.
뭐지. 나 뭐 잘못했나? 하지만 짚이는 게 없는데.
쭈뼛거리며 맞은편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자, 목화는 테이블에 종이 한 장을 올려놓았다.
“아침에 발견했다.”
낙원은 반듯하게 펼쳐진 종이를 보고 그제야 아, 하고 약간 입을 벌린 채로 있다가 낭패감 짙은 표정을 지었다. 파쇄해서 버렸어야 했는데 이게 박목화의 눈에 띌 줄이야.
“박목화, 그거 별거 아니…”
“별거 아니라니. 정상으로 돌아올 수 없다던데.”
“…어떻게 알았어.”
“찾아봤다.”
네 핸드폰은 전화를 받기만 하고 거는 건 못하는 줄 알았더니 언제 검색이라는 고도의 기능까지 쓰게 됐냐.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건 글렀다는 걸 깨닫고 김낙원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목화는 종이의 한 부분을 손으로 짚었다. 폐기종이라는 병명에 체크되어 있는 지점이었다.
“왜 말 안 했냐.”
낙원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야 말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암이면 모를까.
얼마 전 했던 건강검진의 문진 과정에서 요새 종종 숨이 차다는 이야기를 꺼냈더니, 정밀 검진으로 폐 기능 검사를 하게 되면서 드러난 병이었다.
폐기종은 폐 조직의 탄성을 조절하는 섬유가 파괴됨에 따라 폐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어 호흡이 힘들어지거나 만성적인 기침이 발생하는 등, 폐활량이 줄어드는 질환이었다. 카르테를 살펴보며 의사는 당부했다.
[폐는 한 번 망가지면 완치할 수 없습니다. 만성 폐쇄성 폐 질환 중증 단계까진 가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반드시 금연하십시오.]
의사의 진단을 들었을 때도 크게 놀라지 않았던 김낙원은 예기치 않게 탄로 난 지금이, 박목화의 질타에 더 난감한 기분이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놈은 김정애의 동생 일로 끼어들었을 때 보였던 표정만큼 무시무시했다.
“너도 찾아봤으니 알겠지만 걱정할 거 없다니까. 금연만 하면 그렇게 우려되는 건 아니라고 의사도 그랬어.”
대수롭지 않다고 넘기려 하는 그를 묵묵히 바라보던 박목화가 별안간 손을 쓱 앞으로 내밀었다.
손바닥을 위로 한 채로 뭔가를 내놓으라는 듯이 검지를 한 번 까닥이는 움직임에, 낙원은 그게 무얼 뜻하는지 눈치채고 얕은 한숨과 함께 수트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는 담배 한 갑이 나타나자 목화는 말없이 그걸 노려보다가 낙원의 손에서 그것을 가져왔다.
“경각심이 있긴 한 거냐.”
그 말과 함께 콱, 손을 움켜쥔 것만으로 네모진 담뱃갑이 단번에 형편없이 구겨지는 모습에 낙원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엉망으로 우그러진 담배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져넣으며 박목화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이제 끊어라.”
가부를 논하지 않고 자리를 뜨는 그의 등을 바라보던 김낙원은 담배를 끊지 않으면 다음엔 내가 저렇게 되겠구나 싶은 강렬한 예감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뭐, 반대였으면 나는 더 난리였겠지.
기동대가 기습 단속으로 도망 다니는 자와 잡는 자들로 나뉘어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아수라장을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지켜보는 낙원은, 팔짱을 낀 자세로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경정님. 전원 검거했습니다!”
헉헉 숨을 몰아쉬며 보고하러 달려온 김반장에게 알았다는 대답 대신 그는 자욱한 흙먼지가 이는 현장을 벗어났다. 가만 생각하니 어쩐지 억울했다. 내가 저런 범죄자 놈들처럼 도박이나 마약에 빠진 것도 아니고 겨우 기호품인 담배 좀 피웠기로서니 경각심 없단 소리까지 들어야 하나.
“참나, 징한 새끼들. 토낄 데도 없구만 기운만 빠지게 왜 악착같이 도망다녀?”
“그러니까 말입니다. 휴, 이제 한숨 돌리겠어요.”
“담배 가진 거 있어? 아까 산다는 걸 깜박했네.”
“나 돛대 뿐이여. 딴 데 알아보슈.”
범인들을 잡느라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수사부 사람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한 건 해결했다는 성취감에 뿌듯한 그들은 노고를 위로하며 현행범을 실은 승합차가 멀어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습관처럼 서로 담배를 권하며 짧은 휴식을 즐기는 부하들을 김경정이 아니꼬운 기색으로 쳐다보자 그나마 눈치 빠른 박경감이 슬그머니 그에게 다가갔다.
“경정님도 피우시겠습니까?”
장초를 한 대 내밀어 권했으나 김낙원은 치우라는 듯 손을 저어 거절했다. 저 인간이 왜 저러지. 불길한 징조에 다들 주춤주춤 한 걸음씩 멀어지려 하는데 문제의 인물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들 좋겠어.”
“예?”
“줄담배로 폐가 시꺼매지든 말든 집에서 걱정하는 사람도 없나 봐. 나는 탈 날까 염려되니 당장 끊으라고 얼마나 난리인지, 원. 말도 못해.”
막 담배에 불을 붙인 그들을 측은하다는 양 혀를 차던 김경정은 너구리굴이 따로 없다고 질색하면서 먼저 자리를 떴다.
“왜 저래. 담배 맛 떨어지게.”
“저건 대체 자랑이에요, 신세 한탄이에요?”
“잡혀 산다는 자랑 같은데.”
졸지에 걱정해주는 사람 하나 없는 흡연자 무리가 된 그들은 김경정이 휩쓸고 지나간 곳에 남아 입맛을 쩝 다셨다.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세단이 매끄럽게 박목화 앞에 멈춰섰다.
“덥지. 얼른 타.”
김낙원이 창문을 열고 손짓했다. 권하는 대로 조수석에 올라 에어컨으로 시원하게 식혀진 차에 몸을 싣는 순간, 박목화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낙원은 오랜만에 밖에서 보는 박목화가 반가워 전방을 응시한 채로 말을 걸었다.
“이왕 나온 김에 밥이나 먹으러 갈까? 이 근처에 냉면 잘하는 데가…”
“김낙원.”
“응?”
“잠깐 저기 세워라.”
저기? 옆을 바라보자 목화가 바로 앞에 있는 대형마트를 턱으로 가리켰다. 뭐 살 게 있나. 의아한 마음으로 시키는 대로 핸들을 꺾어 한적한 주차장 구석에 차를 세웠다.
“왜? 마트는 밥 먹고 들러도,”
“너. 담배 피웠냐.”
말을 자르며 박목화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김낙원을 추궁했다.
“뭐? 아냐.”
“냄새난다.”
아까 수사부 놈들 피울 때 옆에 있어서 그런가. 낙원이 당황하여 옷깃을 끌어당겨 확인하는 걸 본 목화가 갑자기 기어 뒤 콘솔박스를 벌컥 열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더니, 하필 그 안에 언제 넣어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담배 한 갑이 포장이 뜯겨서 덩그러니 들어있지 않은가. 박목화의 홑꺼풀 눈매가 마약 밀매 현장을 잡은 형사처럼 날카로워졌다.
“야, 진짜 안 피웠어!”
난 결백하다고! 김낙원이 소리 높여 부인했다. 부하 놈들이 권할 때 한 대 피우기라도 했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냄새가 묻은 이유를 설명하려는데 맞은편에서 손이 불쑥 뻗어와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드잡이질을 방불케 하는 억센 손놀림으로 당기는 바람에 낙원이 얼결에 끌려가자 목화가 그의 쇄골 근처 셔츠 깃에 깊이 코를 묻었다.
들이쉰 숨결에 담배 특유의 매캐한 내음이 섞여 들어온다. 다만 흡연자들이 으레 그러하듯 몸 구석구석에 밴 냄새는 또 아니라 긴가민가한 마음에 확신이 서는 건 아니었다. 고개를 들자 낙원의 표정은 불만이 잔뜩 어려 입이 댓발 나와 있었다.
“사람 못 믿냐? 아니라니…”
말을 미처 끝맺기 전에 낙원의 입술에 따뜻한 온기를 띤 무언가가 겹쳐졌다. 예상치 못한 습격에 반쯤 벌려진 채였던 입술 틈새를 가르면서 박목화가 자신의 혀를 밀어 넣은 것이다.
어안이 벙벙한 김낙원의 뒷덜미를 손으로 감싸 끌어당긴 그는 혀로 가지런한 치열을 훑으며 입안을 탐색했다. 흡연을 했다면 놈이 즐겨 피우는 담배 맛이 났을 텐데, 예전과 달리 말캉한 혀끝에서 느껴지는 건 상쾌한 가글 향뿐이었다.
정말 아닌가. 비로소 안심한 그가 안에 밀어 넣은 혀를 물리자 시야에 들어오는 발그레한 입술 사이로 누구 것인지 모를 타액이 방울져 맺혀 있었다. 어쩐지 머쓱해진 박목화가 엄지로 그 타액을 슥 닦아준 후 몸을 떼어내려는데, 이번엔 김낙원이 그의 허리를 잡아당겨 멀어지는 입술을 다시 덮었다.
부드러우면서 물기 어린 젖은 소리가 차 내부를 가득 채웠다. 팽팽히 잡아당겨진 안전벨트 때문에 더 다가가지 못하자 낙원이 신경질적으로 벨트를 풀고 조수석을 뒤덮듯 상체를 기울였다. 한낮의 햇볕이 놈의 훤칠한 몸에 가려져 어두워지자 박목화는 눈을 감았다. 시야를 차단하자 느껴지는 건 뺨을 감싼 손바닥의 온기와 교차하는 서로의 호흡, 그리고 잡아먹히는 듯한 키스로 발끝까지 퍼지는 흥분만이 남는다.
마구잡이로 만져대는 놈의 손길이 이윽고 벨트 버클을 풀고 대퇴부 언저리를 배회하는 걸 알아채고 겨우 이성을 되찾았다. 아무리 선팅이 되어 있다 해도 벌건 대낮에 사람들이 오가는 마트 주차장에서 이런 짓을 계속할 순 없었다. 손목을 쥐어 저지하니 낙원이 목덜미 부근을 잘근잘근 깨물다 말고 낮게 웃었다.
“이런 단속이라면 매일 당해도 환영인데.”
노골적으로 쓰다듬는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아, “안 피운 거면 됐다.” 하고 목화가 젖은 입을 닦으며 손을 치우려 하자 아래에서 둔중한 통증이 일었다. 제법 강한 악력으로 힘을 준 낙원이 정면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다.
“왜 애인 말을 못 믿어. 내가 너 몰래 숨어서 피우기라도 할까봐?”
“믿지 못한 게 아니다.”
“그럼 뭔데.”
박목화는 대꾸하는 대신 눈을 내리깔았다. 김낙원이 말한 것처럼 이 녀석은 자기가 피우고 싶다면 말리든 말든 눈앞에서 당당히 피워댈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염려가 되는 것이다. 자신에겐 갖은 잔소리를 늘어놓으면서도 정작 본인 건강은 가볍게 여길 놈이라서.
생각에 잠긴 박목화를 가만히 지켜보던 김낙원이 문득 입을 열었다.
“알았어. 완전히 끊을게.”
목화가 눈을 들자 장난기를 거둔 진지한 눈빛을 한 그가 말을 잇는다.
“담배 피우는 놈들 근처에도 안 갈 테니까 걱정 마라.”
뺨을 감싸 쥔 낙원이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가볍게 맞닿는 키스가 입술에 내려앉는 감촉에 목화의 눈이 가늘어진다.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다고 말을 걸어오는 듯한 입맞춤이었다.
“김…,”
“그 대신 심심해진 입은, 네가 달래주는 거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냉큼 덧붙이는 말에 박목화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샜다.
왜 웃어, 진심인데. 투덜대는 놈의 머리를 말없이 끌어당긴 그는 반쯤 뜨고 있던 눈을 마저 감고 맞닿은 입술을 더 깊이 눌렀다.
늦은 오후 내리쬐는 뙤약볕이 그런 둘을 못 본 척 구름 사이로 그 빛을 숨긴다.
왜 알람이 안 울렸지.
커튼 사이로 비쳐 들어오는 빛에 눈을 뜬 목화는 이마 위에 팔을 올려둔 채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이 휴무일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자 일순 몸에 흘렀던 긴장이 풀려 그는 잠시 침대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평소엔 쉬는 날이어도 늦잠을 자는 일이 좀처럼 없으니 드문 하루의 시작이었다.
나른하게 둔통을 호소하는 몸을 일으키자 어젯밤의 여파로 몸 여기저기가 욱신거렸다. 까칠한 얼굴을 손으로 두어 번 쓸어내리고 박목화는 천천히 침실에 딸린 욕실로 향했다.
긴 샤워를 하고 나오니 몽롱했던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문 너머에서 티비 소리인듯 왁자지껄한 소음이 들려와 침실 밖을 나오자, 활짝 열린 전면의 통창 너머로 상쾌한 아침 바람이 커튼 자락을 나부끼며 그를 반겼다.
본격적인 더위가 아직 오기 전인 여름의 문턱이었다. 거실과 연결된 키친에 서서 낮게 콧노래로 허밍하던 김낙원이 목화를 발견하고 웃었다.
“일어났냐. 빵 괜찮지?”
어제 장을 안 봤더니 쌀이 똑 떨어졌네. 그는 이렇게 덧붙이며 버터를 발라 구운 토스트와 에그 스크램블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천천히 빵을 뜯어 입에 넣었다.
별 다를 것 없는 흔한 휴일 풍경이다. 일주일 중 유일하게 김낙원이 먼저 일어나 식사를 준비하고, 느긋하게 그걸 먹으며 오후엔 뭘 할지 대화를 나누는. 근교로 드라이브를 가자거나 맛집을 찾아뒀으니 가 보자는 놈의 제안을 때로는 퇴짜놓고 더러는 수긍하며 흘러가는 시간들.
목화는 재잘재잘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낙원을 바라보다, 불현듯 귀에 들어온 뉴스에 텔레비전을 응시했다.
뉴스에서는 요즘 한창 쟁점이 되고 있는 화제를 다루고 있었다. 워낙 반향이 거센 일이다보니 어딜 가든 이 얘기가 끊임없이 도마 위에 오르곤 했다. 고무적인 표정으로 인터뷰에 응하는 사람들과 그에 대비된 격렬한 반대 시위가 연이어 화면을 비추는 걸 목화는 시선을 떼지 않고 내내 지켜보았다.
“듣고 있냐, 박목화?”
똑똑, 노크하듯 식탁을 두드리는 소리에 목화는 겨우 맞은편으로 눈을 돌렸다.
뭐 볼 게 있다고 애인 말도 귓등으로 듣는지. 불만스레 입술을 삐죽인 김낙원은 하던 말을 마저 꺼냈다.
“이따 나가서 네 여름옷 좀 사자고. 어째 옷장에 죄다 시커먼 바지만…”
“……우리도 할까.”
“응?”
“결혼 말이다.”
에그 스크램블을 포크 위에 얹은 채 낙원은 멍하니 박목화를 바라보았다.
방금 엄청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지금 이 녀석이 뭐라고 했지?
그제야 뉴스가 나오는 화면에 시선을 주었다. 성소수자 단체의 헌법소원 심판 청구를 계기로 치열한 찬반이 오간 끝에 동성혼 입법화가 국회 안건을 통과한, 현대사의 한 획을 긋는 일이 얼마 전 한국에서 있었다. 총선과 대선을 연이어 승리한 진보 정권의 급진적인 이 성과에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면서 아나운서는 또렷한 발음으로 기사를 전했다.
“─결혼?”
입속에서 되뇐 단어가 한 박자 늦게 현실감을 가져왔다.
쿠당탕! 돌연 집안을 울리는 큰 소리에 목화가 흠칫 눈을 크게 떴다. 낙원이 벌떡 일어서는 바람에 의자가 뒤로 넘어가며 난 충돌음이었다.
한 손으로 입을 가린 그는 사과처럼 얼굴 전체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당황한 듯 뒷걸음치던 그가 의자 다리에 걸려 비틀대는 걸 보고 박목화는 바로 일어나 그의 팔을 붙들었다.
“넘어질라.”
재빨리 잡아준 덕분에 꼴사납게 넘어지는 꼴은 면했지만, 김낙원은 여전히 중심을 잡지 못하고 목화를 멀거니 바라볼 뿐이었다. 의자를 일으켜 세우고 목화가 자신을 거기 앉히는 동안에도 눈을 떼지 못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낙원이 목화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손자국이 남을 만큼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갑자기……무슨 소리야?”
터무니없는 이야길 들은 것처럼 김낙원은 경악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 성급한 말이었나. 법에 관해선 이 녀석이 훨씬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목화는 뚫어지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두 눈동자를 차분히 마주 보았다.
“법적으로 배우자 관계가 되면 병원에 보호자로 동반하는 것도 가능하니까.”
“병원 보호자?”
목화의 말을 복창하듯 따라 발음한 낙원이 잠시 후 김이 샌 표정이 되어 “하하…”하며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잡았던 손목을 놓고 그 손으로 맥없이 자기 이마를 감싼 그는 자조적인 말투로 중얼거렸다.
“난 또 뭐라고…….”
곁에 선 박목화의 허리께에 머리를 기댄 낙원이 나직이 말했다.
“필요 없어.”
필요 없다. 예상치 못한 거절에 목화는 잠시 말을 잃었다.
아니, 예상하지 못한 게 오히려 자만이었는지도 모른다. 놈에게도 여러 사정이 있을 터였고 현재의 관계에 부족함을 느끼는 것도 아니니 굳이 결혼이라는 절차를 밟을 이유가 없는 것도 맞았다.
하지만…그럼에도.
그의 거부가 쓰라린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꾹, 양손으로 박목화의 옷자락을 붙든 낙원이 고개를 숙인 채 말해왔다.
“고작 내 간병이나 하겠다고 정할 일이 아니란 말야.”
…고작? 목에 걸린 가시처럼 거슬리는 표현에 목화가 눈을 찌푸렸다.
“애초에 그 정도로 심각한 병도 아니고…….”
“심각하든 아니든.”
이어지는 말을 막으며 놈의 기댄 머리를 떼어냈다. 놀라서 올려다보는 동그랗게 커진 눈동자가, 언제나처럼 말끔하게 빗어 올리지 않은 꾸밈없이 자연스레 내린 머리카락이. 자신보다 놈이 연하라는 사실을 새삼 되새기게 한다.
“그런 일이 있을 때, 네 보호자를 하고 싶은 게 잘못된 거냐.”
살면서 늘 좋은 일만 있을 순 없다. 시간이 흘러 나이가 들면 더욱 그럴 것이다. 어느 쪽이 아프거나 다치는 경우도 조심한다 해서 아예 피할 수는 없다.
그럴 때 곁에 있고 싶었다.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다른 누군가에게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한동안 서로를 바라본 채로, 시간이 흘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 오묘한 표정으로 낙원이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엇비슷해진 눈높이에서 자신을 응시하는 그 시선을 목화도 피하지 않았다.
이윽고 김낙원이 손을 내밀었다.
자신의 오른손을 쥐는 그 손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목화는 깨달았다.
아주 오래전 칼에 맞아 생사를 오가던 속에서, 이대로 보낼 수 없다며 악을 쓰던 외침이 들렸던 그때와 똑같이. 행여 놓칠세라 필사적으로 자신을 부여잡은 품 안에서 느껴지던 그 세찬 떨림이 느려지는 박동에서 의식을 건져 올렸다.
다만,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두려움이 아닌 벅찬 환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었다.
“……목화.”
박목화. 태어나 처음 배운 말처럼 낙원은 오직 그의 이름만을 불렀다.
가늘게 떠는 몸을 끌어안으며 목화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대답, 아직 못 들었는데.”
낮게 웃음기가 섞인 세상 어떤 꽃보다 사랑스러운 애인의 청혼에 낙원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눈부신 빛이 두 사람 주위를 가득 메운 아침이었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지.
정신을 차려보니 좁은 툇마루에 걸터앉아 있었다.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지금 있는 곳은 사방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구릉지대의 단층집이었다. 돌을 차곡차곡 괸 담벼락 안쪽으로 마당에는 항아리며 화단이 있고, 널따란 대야에 호스가 달린 수도꼭지에서 물이 떨어져 작은 웅덩이를 만드는 고즈넉한 풍경.
드센 해풍이 뺨을 할퀴듯 머나먼 바다로부터 불어오고 있었다.
꿈이구나.
목화는 이것이 자각몽임을 인지했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기에 알 수 있었다.
이따금, 스스로의 공상이 꾸며낸 이런 장소에 어떤 맥락도 없이 머무는 꿈을 꾸곤 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자신이 혼자가 아니란 걸 자연스레 깨달았다.
옆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분명한 인기척에도 고개를 돌려 확인할 수 없었다.
바다의 눈부신 윤슬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목화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꿈이 아니면 여기에 올 수 없었습니다.」
연을 끊기 전 삼촌이자 형은 혹여 그곳에 찾아갈 생각은 말라며 못을 박았다. 섬이란 한 다리 건너 모두 아는 사이인 좁은 동네고, 자칫하다간 소문이 파다하게 퍼질 거라면서.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만약 여전히 그곳에 살고 있다면. 지나가던 이가 너는 자기가 아는 사람을 많이 닮았다며 부모의 정체를 캐묻기라도 하면. 그런 생각이 들자 가벼운 여행으로도 향할 수 없는 곳이었다.
가선 안 된다는 강박이 도리어 부채질을 한 것일까. 언제부턴가 그 장소가 무의식 속에 나타나게 되었다.
「하지만 꿈이어도…당신의 얼굴은 만들어낼 수 없더군요.」
사진으로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빈약한 상상력으로는 세세한 형상을 빚어낼 수 없었다.
그래서 이 꿈에서 자신은 늘 정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한 뼘 떨어진 자리에 깃든 기척을 당신이라 감히 짐작하면서.
「이번에 결혼을 하게 됐습니다.」
꿈이란 걸 알아서인지,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하게 말수가 많아졌다. 굳이 할 필요 없는 이야기들이 무언가에 이끌리듯 멋대로 입 밖으로 흘러나온다.
「말이 아주 많은 놈입니다. 그만큼 생각도 많아 종종 뜬금없는 소릴 하기도 합니다. 머리가 좋고 생김새도 예쁘장한데 성격은 좀 심술궂은 데가 있어요. 그래서 가끔 걱정이 됩니다. 그러다 몹쓸 마음을 품은 사람한테 해꼬지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정말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군. 겸연쩍은 마음에 잠시 말을 끊은 사이 뜻모를 웃음이 새어나왔다.
「꿈에서도 자기 흉을 본다고 화를 내겠군요. 자존심이 센 녀석인데 왠지 저한텐 늘 어리광을 피웁니다. 그게 또 귀엽기도 하고…」
두서없이 이야기를 꺼내다 멈칫 목화는 입을 다물었다.
툇마루를 짚은 손 위에, 따스함을 지닌 다른 무언가가 겹쳐져 있었다.
항상 물을 만지고 살아온 이의 주름지고 거칠거칠한 손이었다. 자신의 절반도 되지 않을 만큼 작고 바짝 마른 손가락이 가만히 손등을 덮은 채, 작게 두드린다.
잘 되었다고, 행복하게 살라고 말하는 것처럼.
목화는 그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의 목울대가 어떤 것을 간신히 삼키듯 힘겹게 요동쳤다.
손등을 토닥이는 미약한 움직임을 받는 그의 눈앞에, 온화한 빛을 실은 바다가 푸르게 일렁이고 있었다.
“분명히 이 호수가 맞는데…….”
손가락을 만지작대는 느낌에 박목화는 깊은 잠에서 서서히 눈을 떴다.
사이즈 잘못 준 거 아니야? 미심쩍은 어조로 툴툴대던 김낙원은 무심코 목화의 얼굴을 보더니 흠칫 놀란 표정이 되었다.
“어, 깼네. …왜 그래. 박목화.”
바로 곁에 다가와 앉아 있던 김낙원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으로 더듬대며 말을 걸었다.
아직 침대에 누워있던 박목화가 손을 들어 자기 얼굴로 가져갔다.
흐릿한 시야에 손가락을 갖다대자 눈꼬리에 맺혀 있던 눈물이 두어 방울 볼을 타고 옆으로 흘러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저 목석같은 녀석이…지금 울었어? 낙원은 순간 뭘 잘못 봤나 싶은 심정으로 당황한 나머지 뻣뻣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자면서 불길한 악몽이라도 꾼 건가?
정작 눈물을 흘린 장본인은 아무렇지 않게 덤덤히 젖은 뺨을 문질러 닦았다. 얼굴을 스친 손에서 어떤 낯선 감각을 알아챈 그가 손등을 위로 하고 그게 무언지 유심히 보았다.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둘러진 심플한 은백색 링.
“아무리 혼인신고만 하는 거라지만 결혼하는데 반지는 있어야지.”
또 쓸데없는 걸 샀냐는 타박을 들을까 싶었는지 결혼반지치고는 비싼 것도 아니라는 둥 김낙원이 먼저 선수치듯 말을 늘어놓았다. 물끄러미 자기 손을 내려다보던 목화가 이윽고 희미하게 웃었다.
“……고맙다.”
놈이 함께 보러 가자고 졸라댈 때만 해도 반지가 뭐 그리 필요하냐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와는 다른 관계가 되었다는 증거처럼 약지에 또렷이 자리잡은 반지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감회를 불러 일으켰다. 가만히 그걸 내려다보던 목화가 불현듯 눈을 들었다.
“너는.”
어? 홀린 듯이 박목화의 웃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김낙원은 뒤늦게 두 음절에 담긴 말뜻을 알아차리고 케이스에서 자기 몫의 반지를 꺼냈다. 똑같은 디자인의 그걸 목화가 집어들더니 김낙원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손가락을 너끈히 통과하는 살짝 헐렁한 사이즈에 그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했다.
“이게 내 거 같은데.”
“아, 바뀌었나.”
평소와 딴판으로 허둥대는 녀석의 모습에 목화는 다시 웃고 말았다.
서로의 약지에 제자리를 찾은 두 개의 반지가 끼워진 광경을 김낙원은 믿겨지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한동안 그 여운을 음미했다.
이 날이 오긴 오는구나. 상상과는 달리 로맨틱한 장소도 아니고 막 일어나 머리는 까치집을 한 채로 반지를 나눠 끼는 이 상황이 웃기기도 했지만 그를 상회하는 감개무량한 기분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감동에 북받친 나머지, 와락 박목화를 끌어안았다. 품에 꽉 들어차는 따끈한 체온을 두 팔로 감으며 김낙원은 한 글자 한 글자를 새기듯 말했다.
“반품 불가다. 박목화.”
이제 못 물러. 싫어도 평생 데리고 살아야 돼, 알겠지.
귓가에 세뇌하듯 중얼거리는 말들에 목화는 피식 웃었다.
“늦겠다.”
“형들은 대체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예요?”
입술을 삐죽 내밀고 지인이 못마땅한 어투로 물었다.
언제부터냐고? 다른 네 명이 각자 생각에 잠기더니 대략적인 시기를 댔다.
“난 하와이 여행 때부터.”
“여기 첫 출근했을 때 벌써 삘이 오던데.”
“하기사. 같이 동거한다는 거에서 끝났지 뭐.”
경쟁하듯 내가 먼저 알았다고 눈치챈 타이밍을 말하는 그들을 지인은 충격에 빠진 얼굴로 바라보았다.
“와, 진짜 치사해. 한마디 귀띔이라도 해주지.”
나만 몰랐고 나만 잠 못 잤어.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고 꿍얼대는 그에게 “니가 무딘 걸 왜 우리 탓을 하냐.” 라고 말한 에코는 좋은 날 얼굴 구기지 말라고 핀잔을 줬다.
“근데 앞으로 사장님은 뭐라고 불러야 해요? 사모…님?”
막내가 자기가 말해놓고 낯 뜨거운 호칭에 부르르 떨자 덩달아 다른 네 명도 소름이 돋은 팔을 마구 비비적거렸다. 막상 둘의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는 「아, 그렇군요.」 하고 별다른 동요 없이 납득한 다음 혼인신고서의 증인 서명란에 누구 이름을 넣을 것인가에 대해 침을 튀기며 자기가 하겠다 다투던 다섯은 이번에도 고심 끝에 원래 호칭을 고수하기로 최종 합의를 보았다.
“어머. 내가 좀 늦었지.”
이마에 맺힌 땀을 손수건으로 훔치며 김정애가 나타났다.
꽃을 나르고 파는 일을 하다 보니 늘상 간편하고 활동성 있는 옷을 즐겨 입던 그녀도 오늘은 차분한 빛깔의 무릎까지 내려오는 원피스에 구두 차림이었다. 질끈 하나로 묶던 머리를 오늘따라 곱게 올린 김정애는 너무 아름다우시다며 난리인 애들 사이에서 민망한 듯 작게 웃었다.
한 달 전, 어쩐 일로 둘이 나란히 찾아와 비장한 얼굴로 결혼을 하게 됐다며 혼인신고서의 증인이 되어달라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 정애는 저도 모르게 약간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동생이 눈에 띄게 당황하며 안절부절못하는 게 보였지만 주책맞게도 멈춰지지 않았다. 살 만큼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그토록 다양한 감정이 뒤섞인 눈물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참을 운 그녀는 눈앞에 있는 두 사람 손을 꼭 잡으며 그저 이렇게 말했다.
잘 됐다. 정말 잘 됐어.
“뭐 이렇게들 호들갑이야. 너희들이 결혼하냐?”
거만하고 익숙한 음성이 들린 곳으로 모두의 이목이 몰렸다.
블랙 더블버튼 수트를 차려입고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 없이 빗어넘긴 김낙원은 마치 잡지 화보에서 막 빠져나온 모델 같았다.
저 사장님은 입만 안 열면 완벽한데. 샐쭉해진 다섯이 눈을 흘기는데 뒤이어 들어온 사장 형을 본 순간 와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
하이 칼라의 보타이 셔츠에 평상시엔 잘 입지 않는 각 잡힌 재킷을 걸친 박목화는 매일 함께 일하던 친숙한 형이 아닌 어딘가 범접하기 힘든 위압감을 두른 다른 인물처럼 보였다. 이를테면 느와르 영화에서 배후로 등장하는 은밀한 암흑계의 보스라던가.
“둘 다 몰라보겠네.”
김정애가 웃음을 섞어 말하자 무뚝뚝하던 목화의 얼굴에 쑥스러운 미소가 드리워졌다.
뿌듯하고 감회 어린 눈빛으로 둘을 바라보던 그녀는 오늘을 위해 준비해온 선물을 꺼내 각자의 가슴 포켓에 달아주었다.
끝자락을 연한 분홍빛으로 물들인, 흰색 마가렛 메릴 장미로 만든 부토니아였다.
“…누님.”
“꽃집 하는 누나 둬서 뭐하니. 이럴 때 쓰지.”
동생의 드넓은 등을 두드리며 정애는 또 눈치없이 나오려 하는 눈물을 감추고 활짝 웃었다. 누님이 달아준 부토니아를 조심스레 만지작대던 목화는 “감사합니다.” 하고 입가를 약간 끌어올리며 인사를 건넸다.
「저희가 준비 다 해둘 테니 천천히 다녀오세요~」, 「좀 있다 원일이 형들도 온대요!」, 「그 새끼들은 뭐하러 와. 쫓아내.」 왁자지껄한 대화가 한 차례 오간 뒤에야 두 사람이 [오늘 전일 대관으로 임시 휴무합니다] 라고 적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그들 중 하나가 깊은 탄식과 함께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장 형이 아깝단 말야.”
“내 말이.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하시면 안 되나.”
“아서라. 저 사장님 귀에 들리면 어쩌려고 그래.”
동생들을 말린 에코가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그리고, 하며 덧붙였다.
“형이 저런 눈으로 보는 사람이 또 있겠어?”
울창한 나무 그늘 사이로 걷는 두 남자의 보폭은 맞춘 것처럼 같았다.
무언가를 조잘조잘 떠들던 낙원이 사레에 걸렸는지 두어 번 기침을 하자, 큼지막한 손을 들어 살며시 등을 쓸어주는 목화의 눈이 더없이 다정한 빛을 품은 걸 보며 다른 넷도 석연찮게나마 납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그렇지.
무더운 날씨였지만 청량한 햇살이 조촐한 하객과 그들의 머리 위에 드리워진다.
싱그러운 여름의 웨딩 로드로, 한 부부의 탄생을 알리듯 나긋한 산들바람이 불었다.
